인터넷이 미쳤다.

인터넷이 미쳤다. 아니 인터넷은 죽었다. 적어도 미쳐가거나 죽어가는 것 같다.

인터넷의 목적은 무엇인가? 다수가 쉽게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적어도 10년 전만해도 이런 취지는 반영되었다.
그러나 지금 인터넷은 정말 독선적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인터넷도 많이 변한것은 사실이다. 속도등 시스템적인 면에서 놀라운 성장도 했지만 인터넷의 본연의 모습은 흐려지고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10년 전의 인터넷은 단순함의 흥분이었다. 실로 네티즌이 왕이었다. 네티즌을 위한,네티즌에 의한 사이트였다. 속도만 느렸지 네티을 구속하거나 제약한 그런 것은 없었다. 네티즌의 편의성을 생각한 사이트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인터넷은 일방적인 발전을 하고 있다. 마치 산업발전에 따라 노동자들을 소외하는 것처럼 인너넷의 발전에 따라 사람은 점점 소외되고 있다. 쉽게 말하지면 고객은 봉이되어 가고 있다. 고객인 네티즌은 웬만한 사이트에서 정보를 검색할려면 자기 정보를 어느정도 정성스럽게 알려주어야한다. 초기 인터넷의 간단하고 쉬운 로그인 서비스는 이제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다.

또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그 수많은 사이트에 뿌려 놓은 내 정보가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조지오웰의 1984년이나 영화 이퀄리브리엄 에서 처럼 인터넷은 빅브라더가 되고 있다. 내가 어디서 무슨 사이트를 보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빅브라더 인터넷은 자세히 알고 있다. CCTV은 거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터넷에서도 24시간 커져 있다.

초기 인터넷에 비해 속도는 일취월장 했지만 네티즌에게는  여전히 속도는 불만이다. 고객을 배려하지 않는 덩치 큰 사이트가 원인이다. 액티브 x, 플러쉬, 보안모듈, 팝업창.. 사이트를 열때마다 쏟아지는 이런 것들때문에 정말 짜증이 난다. 취약층(장애인,노인)의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정말 인테넷은 우리를 배려하고 있기는 하건가?.

블러그를 개설시 엠파스를 믿었다. 10년 넘게가는 사이트가 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엠파스는 남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블러그를 개설했다.그리고 많지는 않지만 틈나는대로 글을 관리했다. 결과는?  갑자기 네이트로 인수되고 블러그도 새로 네이트로 이전해야한다고 해서 없는 시간내서 힘들게 이전했다. 네티즌은 봉인가?  믿고 수많은 자료를 입력했던 사이트가 갑자기 폐쇄되고 불편함을 모조리 네티즌이 감수해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 인터넷이 이상하다. 정말 미쳤다.

인터넷은  진정 약자의 편인가? 소통의 도구로 토론의 광장으로 인터넷은 가치가 있다고 본다. 다수의 의견을 반영하는 인터넷은 아고라 광장이고 신문고이다. 하지만 해를 거듭할 수록 인터넷은 가진자, 배운자가 자신의 왕국을 홍보하는 수단으로 가고 있다. 우익이든 좌익이든 회사든 정부든 일방적인 홍보만을 하고 반대 의견은 차단할려고 한다. 진정 인터넷에서 자유의사에대한 검열이나 모독죄가 필요한가?  인터넷인데.. 고속도로는 자동차 사고가 있다하더라도 자동차는 다녀야 한다. 수많은 조회수를 자랑하는 유명인의 블러그나 사이트가 여론을 주도하는  현실이 안스럽니다. 

건강도 챙길겸 통행수단으로 전철을 많이 사용한다. 어느날인가 늘 가지고 다니던 교통카드를 놓고 와서 전철표를 구매할려고 했다. 그런데 매표소가 없어진 것이다. 늘 근무하던 역무원도 없고 닫혀진 창문에 '자동판매기를 이용해주세요' 라는 문구만 작게 걸려 있다. 자동발권으로 시스템을 바꾼것이다. 하지만 이 자동발권기라는 것이 너무 웃긴다. 자칭 좋은 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배운사람이라고 자처했던 본인도 1회용 전철표를 발권하는데 엄청 당황했다. 내심 왜 내가 기계하고 이런 씨름을 해야하는지 부아가 치민다.  역무원이 따뜻한 손으로 전달해주는 시스템이 뭐가 비합리적이여서  이렇게 기계와 대화하게 하는 것일까? 인터넷도 실상 이렇다. 대형 포탈이나 은행사이트에 전화를 걸어보면  자동응답 시스템이 먼저 대응한다. 고객임을 확인하기 위해 고객의 주민등록번로를 입력해주세요... 등등.. 왜 기계에 우리는 순응해야하는 건가?  따뜻한 정이 있는 상담원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눈에 크게 떠야한다. 사이트 어디에도 일반 전화번호는 쉽게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품을 구입하고 나서 세금계산서나 현금영수증도 고객이 기계에 따라 모두 처리해야한다. 배송조회니 서비스니 모두 그렇다. 서비스 제공자는 편히 있고 고객이 다 알아서 처리하겠금 되어 있다. 서비스제공자는 업무효율상 좋게지만 고객의 불편함은 이루말할 수 없다.  고객에게는 자신의 정체를 최대한 숨기고 고객의 정보를 쉽게 얻어가면서도 당연하듯이 발전하는 인터넷은 이해할 수 없다.

인터넷의 피해를 제론할때 첫번째는 음란물의 홍수이다. 그래서 정부차원에서 청소년을 보호하고자  음란사이트를 모니터링하고 봉쇄하는 작업을 지속으로 하고 있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환영하고 격려할 사항이다. 그런데 정말 미쳤다. 알몸뉴스라고 캐나다에서 시작된 서비스는 아나운서가 알몸으로 진행한다. 어떻게 이런 것은  정부의 승인을 얻고 버젓이 서비스를 할 수 있다 말인가? 성매매니 음란사이트니 한쪽에서는 단속하고 성호기심 충족이라는 말도 안되는 포장으로 성인사이트는 허가를 받고 권장되고 있다. 인터넷은 정말 미쳐가고 있는 것 같다. 성인사이트 등은 경제논리에 의해 조장되는 면도 없지 않다.  

니체는 왜 신은 죽었다 라고 했을까? 니체는 신은 신의 세상이 있고 인간은 인간의 세상이 있듯이 신은 인간의 세상에 관여하지말아야 인간이 행복하다는 뜻이다.

인터넷도 죽어야한다. 인터넷이 인간의 세상에 너무 관여하면 행복하지 않을 것은 뻔하다.영화  테미네이트나 이글아이에서처럼  너무 거대해진 시스템이 자체적으로 진화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가설은 웃을 일이 아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란는 뜻이다. 인터넷은 일종의 도구이다. 인터넷를 기획하고 구축하는 사회 지도층에서 이런 마음을 새겨두어야 할 것이다. 인터넷이 먼저여서는 안된다. 사람이 먼저야 한다.  영국 언론인겸 소설가 체스터턴은 "결과는 이제 명백하다. 그것은 광명과 암흑사이고, 우리는 그 중 하나를 반드시 선탹해야만 한다." 라고 했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우리의 선택에 따라 미래는 결정될 것이다.
 

by 다큰왕자 | 2009/07/05 12:09 | 웹에이전시 短想 | 트랙백 | 덧글(1)

에피쿠로스의 [쾌락]

에피쿠로스는 자연의 목적은 쾌락이다라고 했다.
쾌락이란 무엇인가? 쾌락은 정적인 쾌락과 동적인 쾌락이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쾌락주의란 실제적이며 동적인 쾌락 즉 환희와 즐거움을 의미한다. 이는 퀴레네학파가 주장하는 것이고
에피쿠로스의 쾌락은 정적인 쾌락으로 마음의 동요 없음(아타락시아)과 육체적으로 고통이 없는 상태(아포니아)을 의미한다.
에피쿠로스는 퀴레네학파와는 달리 쾌락의 한계를 강조한다.
"모든 고통스러운 것들의 제거가 쾌락크기의 한계이다. 쾌락이있는 곳에서는 그것이 있는 한, 육체나 마음의 고통이 없으면 양자 모두의 고통도 없다"
마음이 평온한 상태이거나 육체적 고통이 해소되는 한계까지의 쾌락을 존중한다.
이 한계를 넘어서는 쾌락은 또 다른 고통을 주는 인간의 어리석은 욕망으로 가르친다.
기본적인 의식주의 결핍에 따른 신체적 고통이 해소될 때 사람은 최고의 쾌락을 느낀다.
하지만 더 나은 옷, 더 좋은 음식에 대한 욕망은 쾌락의 한계를 넘어서 욕심과 불안의 고통을 수반한다.
쾌락에 대한 욕망은 1) 자연적인 동시에 필연적 것(배고픔,추위 등) 2) 자연적이긴 하지만 필연적이지 않는 것(더 사치스런 음식 욕망)
3) 자연적인지도 필연적이지도 않는 것(유명해진 싶은 마음)이 있으나 쾌락은 1)에서만 완전하다는 것이다.
아타락시아 즉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평안한 상태에서 멀어지는 이유느 신과 죽음 그리고 삶에 대한 공포때문이다.
아타락시아는 신과 죽음에 대한 공포, 삶에 대한 욕망 등을 정확히 이해함으로서 달성된다.

이에 대해 에피쿠로스는 신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것을 강조한다.
"축북받았으며 불멸하는 본성(신)은 그 스스로 어떤 고통도 모르며, 다른 것들에게 고통을 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런 본성은 분노나 호의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분노나 호의는 단지 약한 것들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신은 절대 불멸의 존재로 사람들처럼 근심하거나 분노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어떤 고통도 주지않는다.
신은 분노의 존재도 아니고 심판의 존재도 아니다. 세상돌아가는 이치에는 초월한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신의 존재 때문에 마음의 평온함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해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강조한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분해된 것은 감각이 없기 때문이다. 감각이 없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이 죽으면 감각이 소멸되므로 죽음이 왔을때 우리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정신적인 평온함은 위의 이치를 알고 자연의 순리에 따른다면 늘 유지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의 주옥같은 사상이 담긴 글을 추려 적어 본다.

"세상은 물체와 허공으로, 물체는 원자와 속성으로 구성되고 계속해서 움직이기 때문에 우주내에서 여러 세상이 존재한다"
"인긴이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천체 현상, 죽음, 고통과 욕망의 한계에 데한 지식이 필요하다. 모르면 마음의 평정함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판단의 기준은 직접적 감각이다. 직접 보거나 느끼는 모든 감각은 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의 모습등 직접가서 확인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근거 없는 추측을 하지말아야 한다."
"삶을 포기할 많은 구실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주 별볼일없다."
"예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예언이 존재하더라도 예언에 따라 일어난 일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아름다음과 탁월함등은 우리에게 쾌락을 제공할 때 가치를 지닌다. 이들이 쾌락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인간이 신에게 필적할 수 있는 것은 우정이다."
인생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한번쯤 에피쿠로스의 [쾌락]을 숙독해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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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큰왕자 | 2008/10/05 18:57 | 웹에이전시 短想 | 트랙백 | 덧글(0)

불안에 대하여 -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읽고 나서.

인간이라는 존재로서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왜 우리는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낮에도 부족해서 밤에 꿈에서까지 여러가지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를 괴롭히기도 한다.
그림자 처럼 항상 머리속에 따라 다니는 이 것의 정체는 무었일까?
판도라상자에서 나온 저주일까? 하나님이 인간의 자만을 통제하기 위한 선물일까?
불안이 없으면 행복할까? 불안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불안이 인간에서 바라는 것은 무었일까?
내가 느끼는 불안이 다른 사람에게도 나타나는가?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던지는 질문이면서도 명쾌한 답을 얻지 못하고 당신 또한 그러하다면 알랭드보통의 불안이라는 책을 추천한다.
불안의 원인은 높은 지위를 바라는 마음이고 사회의 사랑결핍, 능력주의, 불확실성에 책임이 있다고 한다.
"인간은 중세와 현재를 비교할때 어떤 시대의 사람이 더 행복할까?"
대답은 중세시대인. 이유는 이러하다.
중세시대에는 사람의 생활 반경이 대부분 20km 이내에 있고 그 테두리에서 자급 자족의 농경문화와 봉건적 계급사회였기 때문에 타인과의 비교나 경쟁이 없었으나 산업혁명과 프랑스대혁명 이후 인간의 활동 반경이 20km을 넘어서고 능력을 우선하는 자본주의하에서 타인과의 비교 경쟁이 심화되어 현대인들에게 상대적으로 불안의 요인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자존심은 성공을 잠재력으로 나눈 것이다 '라는 제임스의 방정식은 불안에 대해 절묘하게 묘사한다.
자본주의 사회가 성숙될수록 성공한 사람의 신화나 물질적 풍요가 우리를 더욱 성공에 갈망하게 만든다. 신문, 방송, 인터넷등 모든 매체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지는 성공관련 소식과 보다 좋은 기능과 품질의 제품(핸드폰,자동차등)이 쏟아져 나오는 이 세상에서 누가 성공하기 싫어 하겠는가? 하지만 나의 잠재력 즉 능력이 문제인 것이다. 소수의 천재를 제외하고는 우리는 자신의 잠재력을 어느 선까지는 올릴 수 있지만 한계가 있기 때문에, 성공에 대한 욕구만 증대해서, 자존심과 연관된 불안은 자본주의(능력주의)에서는 늘어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불안은 자신이 사회에서 밀려나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무시를 당한다고 생각할때 발생한다. 즉 남들은 모두 잘먹고 잘살고 있는데 나의 기대치(성공)는 줄어들지 않고 나의 능력만 무기력하다고 비교될때 불안은 싹트며 사회가 나를 무시한다고 믿을때 불안은 반사회적 행동으로 연결된다. 사회의 구성원이 모두 성공하거나 모두 실패해서 비교의 대상이 없다면 불안의 여지도 있을 수 없다.
성공한자와 가진자를 미화하는 사회의 사랑결핍 현상이 심화될수록 불안은 증가된다. 이상적 사회라면 소외받는 인격을 사랑으로서 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안의 다른 원인중에 속물근성이 있다. 제임스 방정식에서 보듯 성공이란 속물근성의 발현이다. 우리는 대학, 명예, 지위, 학식, 물질적풍요에 성공의 잣대를 두고 이를 성취하지 못한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멀리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도덕적으로는 이런 행위의 불합리를 받아들이지만 자신의 속물집단에서 쉽사리 벗어날려고는 하지 않는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도 불안의 한 원인이다. 불안은 현대의 야망의 하녀이며 다섯가지 예측 불가능한 요인이 뜻대로 따라주지 않아 발생한다. 다섯가지 요인을 보면 자신의 변덕스런 재능을 우리는 통제할 수 없다는 것, 자신의 실패에 대한 유일한 위안인 불운을 더 이상 세상에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 우리의 지위가 고용주와 고용주의 이익에 달려 있다는 것(고용주의 태도와 고용주의 이익에 따라 고과나 해고,모욕감을 갖기 때문이다), 세계 경제가 불황에 들어가면 생산성은 떨어지고 물가는 상승하며 소비는 줄어들어 기업은 파산하고 실업률은 늘어나면서 불안의 고통은 증가된다는 것이다.

알랭드 보통도 지적한 바와 같이 불안은 분명 현대문명의 결과이며 우리가 자본주의 문명을 포기할 수 없다면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안은 해결할 수 없는 업보일까?
알랭드보통은 인류의 역사는 불안을 해결하는 역사라 논하면서
해박한 지식으로 불안 해법을 제시한다.
1. 철학
인간이 단지 실생활에만 매달려서 산다면 경쟁과 속물근성, 물질만능으로 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해 불안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철학은 이런 무미건조한 삶에서 행복의 의미와 삶의 가차를 분명히 해주는 역할을 한다. 모욕과 비난에 초연한 소크라테스나 알렉산더대왕에게 "태양을 가리지마시오"라고 한 디오게네스 등 철학자들이 보여준 태도나 그들의 학식을 통해 불안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게된다. 철학적인 접근방식을 통해서만 누가 우리에게 반대하거나 우리를 무시할때마다 상처를 입는 대신 먼저 그 사람의 그런 행동이 정당한지 검토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예술
예술은 인류가 불안을 어떻게 묘사하고 그 해결방법을 보여주는 장르이다. 지금 당신이 무척 불안하다면 모든것을 멈추고 화랑에 가서 그림을 구경하가나 음악회에 가서 음악을 들을것을 추천한다. 문학은 세련된 언어로 속물근성을 비웃고 그림은 우리의 인생이 한순간에 지나지 읺는다는 것을 보여주며 음악은 아름다은 선율로 마음을 기쁘게하고 있어 그 순간 만큼 불안은 자리를 잡을 수 없다. 예술은 우리의 명예,지위,자존심을 멋지게 희극화시켜 이런것 없이도 삶은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3. 정치
사회에서 인정받는 지위란 절대적이지 않고 시대에 따라 변한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근육질의 힘쎈 투사가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이 모범이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기사, 산업혁명이후에는 부유한 자본가, 그리고 현재는 스포츠선수가 성공한 지위이다. 같은 시대에서도 구성 사회에 따라 어떤 사회에는 군인이 다른 사회에서는 토지를 소유한 신사가 찬사를 받는다. 불안을 촉발하는 요인도 시대 또는 사회에서 높히 평가된 지위에따라 바뀌어진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불안은 절대적인것이 아니고 사회가 어떤 정치를 채택하느냐에 따라 변경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상적인 정치를 통해 공동체의 관념을 바꿀 수만 있다면 불안은 줄일 수 있는 것이다.
4. 기독교
인간은 모두 죽음을 두고 있다. 인간의 유한성은 부자나 가난한자나 모두 같고 죽음앞에서는 지위란 무의미한다. 기독교의 관점은 신앞에서는 모두 평등하고 예수가 어린아이를 보듯 어른을 보라고 했듯이 동료애가 그 근간을 이루고 있다. 적어도 기독교라는 공동체(교회/성당)안에서는 서로를 이해하고 상대방을 배려해서 불안의 요인이 무디어진다. 기독교는 세속적 도시에서의 풍요한 삶과 지위는 하찮은 것이고 신의 도시에서는 이웃을 사랑하고 겸손과 자선을 실행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이다 라고 가르친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 인간은 대자연에서 하찮은 존재라는 것, 신앞에서는 물질적 풍요는 무의미하다는 것. 기독교는 이런 공동체의 관념을 전파함으로서 인간의 불안을 잊게해준다.
열자는 可以生而生 天福也 (세상에 태어나 산다는 것 자체가 큰 복이요), 可以死而死 天福也 (죽을 때가 되어 죽는 것 자체가 하늘의 복이요), 可以生而不生 天罰也 (살 수 있음에도 살지 않은 것은 천벌이요), 可以死而不死 天罰也 (죽어야 할 때 죽지 않음도 천벌이다)라고 했다. 또한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사람은 땅의 도리를, 땅은 하늘의 도리를, 하늘은 도의 원리를, 도는 자연을 따라야 한다)라 했다. 즉 하늘이 내린 천수를 자연의 원리대로 살면 그것이 곳 도요 행복이라는 것이다.
불안의 원인을 논하기 전에 우리의 마음을 이와같이 비울 수만 있다면 불안은 있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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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큰왕자 | 2008/08/15 22:13 | 웹에이전시 短想 | 트랙백 | 덧글(1)

추억의 홈페이지

1990년대 인터넷초기시대에 인기있던 사이트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이런 궁금중으로 기사를 열람해보았습니다. 1980년대부터 2000년 초기는 우리나라의 벤처신화가 돌풍을 일던 때입니다. 그 때 닷컴기업은 성공의 보증수표였습니다. 아이디어 하나만으로 홈페이지를 개설해서 세간의 화제가 된 업체들이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생각나는 것이 광고배너를 클릭하면 돈을 주는 골드뱅크입니다. 이 사이트는 지금은 폐쇄되고 오너는 무슨 이유인지 곤혹(?)을 치루고 있습니다. 기사를 스크랩하면서 정말 놀라운 것이 그 많던 인기있던 사이트들이 대부분 모두 사라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홈페이지 갈무리 화면이라도 찾아 보려고 노력했지만 허사네요. 그래도 그때의 기사를 읽다 보니 재미 있습니다. 초고속인터넷이 대세인 지금 보면 별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때는 많은 사람의 인기를 누리 사이트들입니다. 그 때 관리자들이 사이트를 캡처해서라도 남겨 놓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저 추억으로 볼 수있는 사이트라 정말 아쉽기 그지 없습니다.
기사를 스크랩하면서 눈에 띄는 사이트를 일단 정리해 봅니다.

홈페이지/개그맨들 코미디사이트 
- 개 설 일 : 1998.3
- 홈패이지: www.gamjaggol.com
- 현 재 : 폐쇄

한국일보]1998-03-06 19면 561자 정보통신·과학 기획,연재
 『IMF 사태로 비어버린 여러분의 주머니에 웃음을 듬뿍 넣어드립니다』 희극인들이 최근 인터넷에 코미디사이트를 개설, 네티즌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강원도 출신 개그맨인 김국진, 김수용, 김용만, 박수홍씨등 4명은 「감자꼴 4인방」 홈페이지(www.gamjaggol.com)를 최근 개설했다. 해당 개그맨의 얼굴사진을 누르면 개그맨 소개와 함께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KBS에서 25년간 코미디를 제작한 김웅래 PD의 「코미디뱅크」(www.comedybank.com)도 네티즌들이 즐겨찾는 홈페이지.  그는 직접 만든 신선한 웃음거리를 매일 「오늘의 조크코너」에 게재하고 있다. 심형래, 김형곤, 임하룡씨 등 인기 희극인들을 소개한 「코미디언들 관상좀 봅시다」와 코미디관련논문, 기고문, 만화, 사진 등이 게재된 「빠진 배꼽금고」 등이 볼만한 코너. 별명이 뺑코아저씨인 개그맨 이홍렬씨도 코미디사이트(bbanco.onnet.co.kr)를 만들었다. 특유의 재치있는 개그와 함께 자신의 저서 「개그나라」, 「사요나라」 등을 소개하고 네티즌들이 참여할 수 있는 게시판도 운영중이다.<최연진 기자>
스타들의 웹세계
- 개 설 일 : 1998.1
- 홈페이지 : www.outstar.com
- 현 재 : 폐쇄
<다음에 계속됩니다>
[한국일보]1998-01-05 17면 577자 정보통신·과학 뉴스
◎디아이티,검색서비스 선봬… 박찬호 13개 최다연예 스포츠 정치 등 사회 각분야의 유명인 가운데 가장 많은 인터넷 홈페이지를 갖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인터넷 전문업체인 디아이티가 최근 국내 처음으로 선보인 유명인 홈페이지 검색서비스 「스타들의 웹세계」(www.outstar.com)를 이용하면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정답은 무려 13개의 홈페이지를 보유한 야구선수 박찬호. 그 뒤를 이어 신세대 댄스그룹 HOT와 탤런트 김혜수가 11개로 2위, 인터넷 모델 이승희가 10개로 3위에 꼽힌다. 정치인으로는 김대중 대통령당선자가 3개, 국민신당 이인제 고문이 2개, 한나라당 이회창 명예총재가 1개를 갖고 있다.

이 서비스를 이용하면 유명인 통계자료 뿐 아니라 정치인 배우 탤런트 가수 개그맨 모델 MC 스포츠맨 등 국내외 스타 2,000여명에 관한 신상명세와 사진도 검색할 수 있다. 또 네티즌들은 온라인 팬클럽을 결성,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들의 팬클럽 홈페이지를 무료로 제작해 운영할 수 있다. 이 서비스는 특히 스타지망생이 자기 홍보를 위해 홈페이지를 무료로 만들어 운영하는 「예비스타 코너」도 운영하고 있다.<홍덕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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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큰왕자 | 2007/10/21 21:53 | 홈페이지박물관 | 트랙백 | 덧글(0)

10년전과 비교해서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다.
컴퓨터시대인 현재는 강산이 아니라 모든 것이 변하는 같다.
10년전에 비해 인터넷기술,생명공학,우주공학등에서 혁신적인 기술이 나오고 있고
자동차,아파트등 우리가 직접 느끼고 있는 모든 사물이 대폭 변했다.
10년전에 비하면 빈곤도 많이 퇴치됐고 각종 질병도 예방됐으며 놀고 먹는 문화도 엄청 좋와졌다.
마음만 먹으면 즐건움을 얻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닌가?
앨빈토플러는 미래의 부라는 책에서
사회의 모습을 10km(?) 질주하는 경주로 묘사했는데
가장 빠른 1등은 기업체고 가장 느린 꼴찌는 법을 관리하는 곳이라고 했다.
아닌게 아니라 의식주와 문화가 급히 변동되고 있는데 법이라는 것은
아직 20년전 것을고수하고 고작해야 몇번 수정만 하는 것이 아닌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법보다 더 느린것이 있다면 나는 당연히 국민의 사고방식을 말하고 싶다.
왜 인간은 한국가의 국민이라는 점때문에 이성적인 판단은 뒤로 둔채 국수주의로 판단을 하는 것일까?
쉽게 풀어말하자면 왜 국가와 국가간의 경계때문에 불법이민자가 생기고 국가간의 충돌이 일어날까?
왜 바다이름을 놓고 이웃나라와 옥신각신하고 배반자라는 여론의 몰매를 맞는 경우가 있을까?
한 국가에서 이성적인 것이 왜 다른 국가에서는 악이되는 것일까?
도대체 언제쯤에나 피부색등을 초월해서 같이 손잡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잇는 것일까?
시대는 점점 동시화되어가는데 국민의 사고는 점점 비동시화되어 가지 않는가?
21세기인 지금도 내 종교만 최고라는 중세기에 있을 법하는 사고가 만연하는 것은 또 무었일까?
내 사업도 10년이 다 되간다.
10년간 나는 변한 것이 있을까? 기술적인 트렌드를 쫏는 것 말고
나도 10년의 세월만큼 사고 방식이 변한 것일까? 참으로 부끄럽다. 변한것이란 이마에 난 주름살뿐이다.
사고는 10년전에 비해 크게 변하지 않은것 같다.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고 아직도 내 국가 내 지역만 생각하는 편협하기 이르데 없다.
그래서 더욱더 부끄럽다.
나는 10km 경주에서 몇등 그룹에 속할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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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큰왕자 | 2007/05/14 10:43 | 웹에이전시 短想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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